휘게 라이프
김도운, 김도희, 정현정
휘게,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지친 당신 집에선 푹 쉬게. 안락 의자와 촛불, 벽난로, 카페트,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이는 모두 2016년 영국의 사전 출판사 콜린스가 브렉시트와 함께 올해의 단어로 꼽은 “휘게(Hygge)”를 대표하는 키워드들이다. 덴마크어인 휘게는 특정 사물을 지칭하기보다는 편안하고 따뜻한,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감정 상태, 분위기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휘게 라이프란 휘게를 최우선 가치로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BBC를 비롯한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휘게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각국의 출판 업계에서는 휘게 라이프를 소개하는 서적들이 연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이미 전세계인의 관심이 ‘휘게 열풍’에 집중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휘게 라이프’를 꿈꾸게 했을까? 전문가들은 휘게의 등장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서 유행했던 킨포크 라이프('친척, 친족 등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인 킨포크(kinfolk)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느리고 여유로운 자연 속의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현상) 열풍, 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내에서 확산되었던 단샤리(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하는 정리법)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비교와 경쟁만을 부추기며 각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패러다임 속에서, 자생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람들은 이제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안겨줄 수 있는 소박한 일상’의 대표격인 덴마크인들의 휘게 라이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높은 실업률, 고용 불안,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역시나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휘게 라이프를 지향하는 트렌드가 감지되고 있다. 가구, 생활용품, 음식뿐만 아니라 전시, 공연 등의 다양한 산업군 전반에서 휘게스러운 제품〮서비스 등이 앞다투어 출시되며, “소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휘게는 기존의 북유럽 감성과 뭐가 다른데?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로 대표되는 ‘북유럽 감성’이 전세계를 강타한 건 이미 오래 전 일이 되었다. 그럼 기존의 북유럽 스타일의 유행과 현재 덴마크 발(發) 휘게 라이프 열풍 사이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휘게란 그 정의에서도 드러나듯 특정 사물이 아니라 감정 상태나 분위기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즉, 여러 해 전 불어 온 북유럽 감성 열풍은 ‘생활용품 업계 전반’에서 시작한 물질 중심적 트렌드였던 반면에, 휘게는 단순히 가구나 소품에 그치지 않고, 전시, 클래식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까지 변화를 가져오며 북유럽 감성 트렌드의 저변을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지는 단순히 가구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등 다양한 영역 전반에 폭넓게 나타난 ‘휘게한 변화들’에 대해 천천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가구
한때 '저렴이 가구'라는 다소 부정적이고 희화화된 이미지였던 가구 메이커 '이케아'는 성공적으로 한국 시장에 안착했다. 단순히 저렴한 가격으로 화제몰이를 해왔던 과거와 달리 거품 빠진 북유럽 스타일의 진면목을 가장 잘 대변한다는 점에서 새삼 이목을 모은다. 실제 이케아의 매출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15년 국내 진출 1년 만에 이케아코리아는 308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 2016년 회계연도 기준 3450억 원을 기록, 12.0% 늘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간 평균 방문객은 약 700만 명 수준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북유럽 전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홈퍼니싱 열풍이 뜨거워짐에 따라 이케아에서 벗어나 오리지널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비용을 더 내더라도 오래 쓸 수 있고 물려줄 만한 가치가 있는 가구와 소품을 사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Figure 1 Ph5 조명
덴마크의 디자이너 폴 헤닝센(Poul Henningsen)이 디자인하고 루이스 폴센(Lois Poulsen)에서 만든 ‘Ph5’ 조명은 북유럽 인테리어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는 대표 아이템으로 통한다. 국내 가는 149만원으로 덴마크의 1.5~2배에 달하는 가격이지만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인테리어 후기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다. 2009년부터 루이스 폴센을 공식 수입해온 한샘넥서스에 따르면 2015~2016년 한해 동안 2.5배 매출 성장을 이뤘다.
기존 북유럽 감성과는 다른 휘게만의 변화는 진짜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단순히 잠깐 유행을 타는 디자인의 가구, 잠깐 쓰다가 버릴 저렴한 가구가 아니라 비싸더라도 오랫동안 쓸 수 있는 가구, 오랜 기간동안 사용해도 크게 유행 타지 않을 디자인의 가구를 구매하도록 사람들을 이끈 것이 ‘휘게’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2. 전시
가구에 이어 전시에서도 휘게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2008년 강남구 청담동의 복합문화공간 ‘10 꼬르소 꼬모’에서 열린 ‘에그체어 탄생 50주년 기념전’이 북유럽 디자인을 소개하는 신호탄이었다면, 2014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렸던 ‘핀율(덴마크 가구 디자이너)’전은 이를 대중에 폭넓게 알린 전시로 꼽힌다. 지난해 9월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 ‘덴마크 디자인’전에는 전시기간 70일 동안 3만 여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하루에 400명 넘는 인원이 방문한 셈이다.
Figure 2 캐릭터 무민
전시의 주제도 약간씩 변화하는 양상이다. 지금까지 ‘북유럽’ 전시가 가구와 디자인 위주였다면 올해는 캐릭터로도 확장했다. 핀란드 화가 토베 얀손의 대표적 캐릭터인 무민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9월 열린다. 토베 얀손의 원화와 드로잉 등이 선보일 예정이다.
Figure 2 무민 전시
3. 소비 성향
휘게 라이프는 어떤 가구를 사거나, 전시와 클래식 공연을 감상하는 것 외에도 일상생활에서도 실현 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이다. 휘게 라이프를 일상에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일상을 새롭고 뜻 깊게 보내기 위한 소비를 지향한다. 이와 관련하여 평범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돕는 서비스들이 등장했다.
그림 렌털 서비스 ‘오픈갤러리’는 고급 원화 그림을 작품 가격의 1~3% 수준의 비용으로 빌릴 수 있는 합리적인 서비스로 인기다. 한 번 계약을 맺으면 3개월 단위로 그림을 교체할 수 있다. 국내 인기 작가들의 작품을 약 8000~9000점 이상 거래하고 있으며 작품을 직접 선택하거나 집안 분위기와 고객의 취향을 고려한 전문 큐레이터의 맞춤 서비스를 통해 추천 받는다. 오픈갤러리에 따르면 2014년 11월 첫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연 200~300% 이상 성장하고 있다.
‘2주마다 행복을 가져다 드립니다’를 모티브로 하는 꽃 정기배송 서비스 ‘꾸까’도 2030 감성을 깨우는 소비로 주목받는다. ‘꾸까’는 영국 유학파 출신의 플로리스트들이 디자인한 꽃을 담아 직접 선별ㆍ제작해 만든 핸드 부케를 정기적으로 배송한다. 기존 7만~8만원이라는 부담스러운 가격에서 1만9900원이라는 혁신적인 가격을 내세운 핸드부케를 선보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에 꾸까는 창립 2년 만에 한달 평균 정기 구독자수 4만 명을 달성했다.
또한 휘게 열풍에 힘입어 느리지만 직접 자기가 도자기를 빚는 수업 등과 같은 원데이클래스 등도 성장하고 있다. 원데이클래스만 모아 소개하는 전문 사이트가 신설됐고, 직접 내가 호스트로 수업이나 모임을 개최할 수 있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지난해 3월 어플로 출시된 소셜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Frip)'은 하루 단위로 참여할 수 있는 각종 클래스 및 체험활동을 개설했다. 출시 이후 매달 가입자 증가율이 평균 27%에 달하며 현재 회원은 25만 명 수준이다.
이처럼 일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원데이클래스처럼 경험을 소비하면서 휘게 라이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여가를 보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느리지만 직접 내가 경험하면서, 제작하면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소비 성향 역시도 휘게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4. 라이프 스타일
Figure 3 라떼파파
휘게 열풍은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올 초 한 TV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라떼파파’는 ‘저녁이 없는 삶’에 지친 한국 사회에 질문을 제기했다. ‘라떼파파’는 오후 나절에 라떼를 든 채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스웨덴 남자를 일컫는다. 가정과 일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휘게식 라이프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단어인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본 시청자들은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라고 넘겼던 당연한 부분들을 돌아보게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구나’를 깨달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제력에 절대적 우선순위를 두던 우리 사회가 조금씩 다른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는 좀 더 사소한 곳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앞서 말한 다소 고가의 인테리어 소품뿐만 아니라 누구나 관심만 있다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향초가 그 대표적 예이다. 최근 몇 년 간 향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는데 이 역시 휘게식 라이프 스타일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집중하던 한국 사회가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 혹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의 질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휴식 공간을 좀 더 아늑하고 향기롭게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 향초 열풍은 이제 단순히 향초 소비에 그치지 않고, 취향에 맞는 향을 제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식생활 역시 휘게의 영향을 받고 있다. 휘게 이전에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웰빙이나 힐링 열풍과 달리 휘게는 건강한 식습관을 강조하지 않는다. 맛 없는 식단을 참고 먹어 건강해지거나 탄탄한 몸을 유지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그에서 오는 행복감을 만끽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티타임 대표메뉴가 아메리카노였다면, 최근의 대표메뉴는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아인슈페너이다. 절제하고 견디는 삶보다 여유를 갖고 즐기는 삶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불황이 계속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휘게 라이프 트렌드
앞에서 살펴 보았듯 경기 침체 속에 덴마크로부터 불어온 휘게 열풍은 가구, 생활용품 등 단순히 특정 물품의 출시뿐 아니라 전시, 소비성향 등 우리가 향유하는 삶〮가치관 전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휘게 라이프 트렌드가 시작된 이유가 장기간의 불황이었기 때문에, 불황이 계속되는 한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지쳐 ‘소박한 행복’을 찾는 이 유행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업계는 이제 단순히 현재 휘게 트렌드에 맞는 서비스와 제품을 기획〮판매하여 당장의 수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힘써야 할 뿐 아니라, 앞으로 더 롱런할 것으로 예상되는 휘게 라이프 트렌드가 차후 어떤 변화를 겪을 지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보고 또 예측해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만 할 것이다.
출처
헤럴드경제, ‘[휘게열풍 ①]인테리어ㆍ전시ㆍ책ㆍ클래식… 일상에 파고든 ‘휘게’’, 2017.02.24
헤럴드경제, ‘[휘게열풍 ②] 휘게 뭐 별건가요? ‘내 맘의 평화’면 그게 휘게죠’, 2017.02.24
헤럴드경제, ‘[휘게열풍 ③] 인생 뭐 별건가요? ‘맛있는 한끼’가 행복이죠’, 2017.02.24
문화일보, ‘추억의 사진첩·나무 질감 장식·따뜻한 촉감 담요… 웰빙 넘어 ‘휘게’가 뜬다’, 2017.01.20
한국일보, "경험을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2017.01.19
프라임경제, ‘북유럽 스타일 '휘게' 제자리…지갑은 '쉬게', 2017.01.31
조선비즈. “[라이프] ‘휘게’를 아시나요? 미국의 ‘킨포크’ 일본의 ‘단샤리’에 이은 덴마크식 라이프 ‘휘게’ 열풍”, 2016.12.26
WOW한국경제TV, ‘’휘게’부터 ‘라떼파파’까지… “북유럽, 오브제 아닌 문화로”, 2017.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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