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미국의 한 약제사가 콜라나무의 잎을 주원료로 하는 음료를 만든다. 상품명 ‘코카콜라(Cocacola)’ 후에 약제사 캔들러가 이것을 상품화하기에 이르고 1919년 회사조직을 설립하고 최초의 청량음료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국방성의 후원 하 에 엄청난 매출의 상승을 이뤄낸다. 콜라의 맛을 잊지 못하는 미국 병사들을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콜라공장을 유럽 곳곳에 세워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코카콜라는 세계 속으로 급속히 퍼져가게 되었고 코카콜라를 처음 접한 유럽 및 아시아인들은 그 신기한 맛을 처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코카콜라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점유해 나갔고 하나의 미국의 상징으로써 코카콜라는 성장하게 된다. 그 후 환타, 스프라이트 등의 청량, 과실음료들이 나타나면서 코카콜라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지기 시작한다. 2007년 코카콜라는 653억달러로(65조 3천억원) 부동의 세계 브랜드가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여기서 7년 늦게 출발한 한 회사가 있다. ‘펩시콜라(Pepsicola)’ 미국의 약사 캐레브 브레헴이 조합한 소화불량 치료약으로 시작한 펩시콜라는 1차 세계대전 동안 급격한 생산비용 상승으로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펩시 상표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2005년 4/4 분기.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의 순이익을 앞서기 시작했고(11억vs 8억 6천만달러) 시가총액도 984억 vs 979억달러로 코카콜라를 앞서기 시작했다. (2008년 기준 펩시 매출액 433억달러, 코카콜라 매출액 319억달러)
세기를 뛰어넘는 도약을 펩시콜라는 어떻게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일까? 펩시는 어떤 마케팅을 통해 코카콜라를 이길수 있었을까?
펩시콜라는 대공황을 어렵게 극복하고 있는 도중 1933년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1930년 동안 코카콜라와 비슷하던 콜라의 값을 코카콜라의 절반으로 내린 것이다. 펩시는 품질이 떨어진다고 인식되었던 펩시콜라를 코카콜라와 비슷한 가격으로 경쟁한다면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가격을 대폭 낮춘다. 그 동안 코카콜라의 선점효과에 펩시콜라는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하였으나 가격의 인하 이후 매출은 꾸준히 증가하게 된다. 당시 로얄 크라운, 닥터 페퍼 등과 경쟁을 하였지만 이 결정 이후 펩시 콜라는 부동의 2위를 지켜 나가게 된다.
위기를 기회로
1970년에는 세계 경제가 요동을 친 격변기였다. 제 1차 오일쇼크를 겪은 세계는 거의 모든 것에 있어서 제품의 원가가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당시 저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던 펩시콜라에게 있어서 원가의 상승은 회사 운영에 직격탄이었다. 펩시 경영진은 이대로 해서 코카콜라와의 경쟁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펩시는 콜라의 가격을 코카콜라 등 경쟁사 제품과 비슷한 정도로 가격을 올리는 동시에 그 동안 쏟지 못했던 마케팅 분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펩시 첼린지’ 는 1970년대 중반부터 펩시가 계속적으로 실시한 블라인드 테스트로서 맛으로써 승부한다는 펩시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보여주지 않고 어느 회사의 제품이 맛있는지 선택 하는 실험에서 펩시는 52%, 코카콜라 48%로 펩시가 근소하게 앞선 것이다. 이 마케팅으로 펩시는 맛에도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당시 6%였던 점유율을 14%까지 끌어올리며 펩시는 더 이상 저가브랜드가 아닌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펩시콜라가 이렇게 기업 이미지를 조금씩 높이고 있는 반면 코카콜라는 당시 반독점소송과 독극물 사태 등으로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다. 오히려 선점효과로 인해 코카콜라가 손해를 본 것이다. 글로벌 마케팅에도 꾸준히 투자하면서 코카콜라와의 격차는 10% 이내로 줄어들었고 위기를 기회로 삼은 펩시의 마케팅은 더욱 공격적으로 코카콜라를 위협하게 된다.
다음 세대의 선택 (the choice of next generation)
1980년 이후 펩시콜라는 다음 슬로건을 내새우기 시작한다. ‘다음 세대의 선택 (the choice of next generation)’ 당시 코카콜라는 기성세대의 틀 안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펩시콜라는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패스트푸드점을 비롯 패밀리레스토랑과 피자헛 등과 전략적으로 제휴하여 꾸준히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즐기는 음료산업인 만큼 더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마케팅을 활용 했다. 기성세대의 코카콜라와 새로운 세대의 펩시콜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그 경쟁에 있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콜라 이외에 스넥사업 에서도 펩시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기업 조직문화에도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타문화와 융합하기 위한 노력,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식의 스넥, 음료는 세계시장에서의 펩시 장악능력을 확실히 앞서게 해주었다. 그 결과 2005년 말 펩시콜라는 드디어 코카콜라의 아성을 120년만에 이겨낼 수 있었고 마운틴 듀, 게토레이등의 음료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그 입지를 확고히 다져나가고 있다.
< 2000년대 초, 브리트니 스피어스 마케팅으로 젊은 세대를 공략 >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도전정신
앞서 짧게 말했던 것에서 위기는 펩시에게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펩시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도전정신,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고 그것은 콜라 점유율에 있어서 120여년간의 2인자 그늘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해주었다. 펩시는 콜라전쟁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새로운 사고를 추구했다. 소프트드링크에서 벗어나 트로피칼음료, 이온음료, 나아가서는 피자헛이나 KFC등으로 식품사업으로도 진출하여 소프트드링크만의 비율을 줄이고 다양한 사업분야로 진출하였다. 또한 강력한 라이벌을 지닌 것을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으며 120년의 그늘아래서 힘들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휘해가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익혀나갔다. 또한 현재보단 미래에 투자하고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은 치열한 경쟁구도로 가는 당시에 ‘웰빙음료’로 성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제품은 선발업체보다는 뒤쳐졌지만 지역사회를 위해선 먼저 투자 할 수 있는 기업 문화는 30년이 지나고 그 후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펩시가 세계시장을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이런 이유와 더불어 펩시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코카콜라라는 강력하고 건실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였을까.
펩시를 코카콜라보다 시가총액과 점유율을 앞서게 한 후 06년 8월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난 스티븐 레이먼드(Steven S. Reinemund) -前 펩시 CEO- 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너무나 강력한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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